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하일 고르바초프 (문단 편집) === 정치인 === 평소 근면하고, 공부도 잘한데다가 출신 성분도 우수했기 때문에 당시 소련 내 엘리트들이 진학하던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법학부에 진학해 1955년 법학 학위를 받았다. 재학 시절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고, 이후 고향인 스타브로폴에서 관리로써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중앙으로 진출했고, 중앙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았다. 고르바초프는 당대의 러시아인 공산당 당원치곤 술을 멀리하고 아첨을 할 줄 몰랐다. 스타브로폴 [[지구당]] 서기 시절 남들보다 매우 적극적으로 중앙에서 내려온 금주 조치를 실천한 까닭에 '광천수 서기'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다.[* 술을 멀리한 덕분에 장수에 도움이 된 듯. 고르바초프와 동갑인 [[보리스 옐친]]은 엄청난 술고래였고, 온갖 질병에 시달리다 2007년 세상을 떠났다.] 서기 재임 시절 휴양 차 스타브로폴 지역을 방문한 고위 당관료들을 성실히 맞이하는 모습이 당시 KGB 주석이었던 [[유리 안드로포프]]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안드로포프는 다른 관리들과 달리 고르바초프가 술을 가까이 하지 않는 모습과 더불어 하루에 10시간 정도 근무를 불평없이 해내던 근면한 근무 자세에 높은 평가를 내리고 고르바초프를 중앙 정계에 적극적으로 기용했다. 이렇게 고르바초프는 농업문제에 대해서 브레즈네프나 코시긴에게 직언하는 등 강단이 있는 간부로 여겨졌고, 1978년 11월 전원회의에서 서기국 서기에 선출, 정치국 후보위원을 거쳐 정치국 위원에 선출되었다. 1980년대 고르바초프는 소련 공산당 정치국에서 최연소 정치국원이 되었다. 서기국 책임자가 되었다.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브레즈네프]]도 그를 상당히 높이 평가하여 바로 정치국 위원 자리를 주려고 했고 [[유리 안드로포프|안드로포프]]도 그를 아꼈다. 반면 [[콘스탄틴 체르넨코|체르넨코]]는 고르바초프를 전임 서기장이었던 안드로포프의 인맥으로 생각하여 견제했다. 안드로포프는 고르바초프가 자신의 후임자가 되길 바랬으나 1984년 일찍 사망하면서 원로 정치인이었던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승계한다. 당시 체르넨코는 차후 서기장에 오를 수도 있는 유력자였던 고르바초프를 견제하기 위해 고르바초프를 정치국에서 해임하려고 했으나, 고르바초프에게 우호적이었고, 서기장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던 국방장관인 [[드미트리 우스티노프]]는 고르바초프를 지지하였다. 1985년 3월 체르넨코가 평소 앓던 지병으로 사망하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새로운 서기장 후보를 두고 고심했다. 당시 소련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미국과 군비경쟁으로 인한 막대한 군비 소모, 경기침체 등 해결해야 할 사안들이 산재한 상태였다. 따라서 정치국은 이전 전임자들과 달리 장기적으로 국가를 통치하면서 동시에 체제 개혁을 주도할 지도자를 찾기 시작했다. 당시 정치국에는 몇십여년 가량 소련 외교를 이끈 [[안드레이 그로미코]]등 오랜 시간 동안 소련 정치계를 이끌던 원로 인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이 되기 전 세 명의 서기장이 '''1년마다 한 명씩 노환으로 사망'''했던 일을 지켜본 공산당 지도부는 또다시 지도자를 맡은 원로 정치인이 별다른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연달아 노환으로 사망하는 일만큼 피하고자 했다. 따라서 당시 정치국원 중 가장 젊으면서도 평판이 좋은 신진인사에 속했던 고르바초프는 유력 후보로 떠올랐다. 따라서 1985년 3월 11일, 정치국은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신임 서기장에 선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